내 블로그의 포스팅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글은 “가는 날이 장날이다 – 장날의 의미”다. 사실 이 글은 ‘가는 날이 장날이다’라는 속담을 다룬 글이 아니라, 단양에 놀러 갔을 때 들렀던 오일장에서 비롯된 시장에 대한 상념이었다.
속담의 유래는 서론으로써 첫 문단에 간략하게만 다루었는데, 이 글을 읽은 방문객의 대부분이 포털 사이트 검색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속담의 유래가 궁금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가는 날이 장날이다”라는 속담처럼 사람들이 매우 흔하게 사용하나 그 유래나 어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표현들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봤다. 한 동안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다가 ‘학을 떼다’라는 표현이 불현듯 생각났다.
주위 지인들을 통해 테스트해보았는데, “학을 떼다”라는 표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나 “학을 떼다”에서 “학”이 무슨 뜻인지, “떼다”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을 떼다"에서 "학"이란?
“학을 떼다”에서 “학”은 “학질”을 말한다. 우리에게는 “말라리아”로 유명한 질병이며, 순우리말로는 ‘고금’이다.
말라리아는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된 모기를 매개로 인간에게 전파되는 기생충병이다. 감염된 모기에 물린 후 약 2주의 잠복기가 지나고 나면 극심한 발열과 설사, 구토, 발작이 일어나며 빈혈, 두통, 혈소판 감소 등의 증세도 나타난다.
말라리아를 뜻하는 ‘학질’에서 학(虐)은 학대, 학살의 학과 동일한 한자를 쓴다.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라 과거에서부터 그만큼 모질고 끔찍한 병으로 일컬어지던 것이다.
학질과 유사한 우리말 또는 한자어 질병
학질 말고도 외국어, 외래어로 우리에게 익숙한 질병이 있고, “학”처럼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다 보니 질병을 말하는 줄 모르는 용어들이 있다. 이를테면 ‘염병하다’, ‘지랄하다’가 있는데, ‘염병’은 ‘장티푸스’라는 병을, ‘지랄’은 ‘간질’이라는 병을 의미하는 한자어다.
이밖에도 우리는 ‘한센병’을 한자어로 ‘나병’이나 순우리말로 ‘문둥병’이라 부르기도 하고, 과거에는 ‘정신분열증’이라고 불렸던 병이 이제는 ‘조현병’이라는 단어로 고쳐 불러지고 있다.
아무래도 더 정확한 진단에 따라 병을 표현하는 방식이 개선되거나(i.e. 조현병), 서양의학의 주류화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병명으로 치환되다 보니(i.e. 한센병) 병명에서 유래된 옛 표현들은 갈수록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학을 떼다’의 의미와 학질의 공포
“학을 떼다”에서 “떼다”의 사전적 의미는 “붙어 있거나 잇닿은 것을 떨어지게 하다”다. 벽에 붙어 있던 벽지를 뗀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걸렸던 감기도 완쾌되면 감기를 “뗐다”라고 말한다.
정리해보자면 ‘학’과 ‘떼다’를 조합해보면 걸린 학질을 치료하려고 고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질이라는 병의 지독한 증상들과 학질이 얼마나 끔찍한 병으로 여겨졌는지를 감안해보면 ‘학을 떼다’라는 표현이 왜 진절머리 날 만큼 괴로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상황에서 쓰이는지 유추할 수 있다.
‘떼다’는 표현이 일상에서 자주 쓰이다 보니 ‘학을 떼다’라는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건 요즘 사람들이 ‘학질’이라는 질병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말라리아는 ‘나쁜’을 뜻하는 ‘mal’과 ‘공기’를 뜻하는 ‘air’로 이루어진 말로, “나쁜 공기를 통해 전파된 것”으로 생각됐을 만큼 한 때 인류에게 흔하면서도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아직까지도 매년 수백만 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에 사라졌다가 90년대부터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말라리아는 모기가 매개체다 보니, 보통은 질병의 근원지인 아프리카나 우리에게 위험지역으로 알려진 동남아시아처럼 더운 지역에서 유행하는데, 기후변화로 인해 여름이 길어지고 기온이 상승한 탓에 인류에 대한 말라리아의 위협이 현대에 다시금 심각해졌다고 한다. 심지어는 히말라야 고산지대까지 모기가 출현하며 말라리아 발병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고 보면 학을 떼다, 라는 어원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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