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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리뷰

아름다운 우리 수필(이태동 엮음) 리뷰와 추천하는 이유

by 저피 2020.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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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정리하다 낯선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장 구석에 오래된 책들 사이에 꽂혀있어 있는 줄도 몰랐던 책이다. 게다가 내 책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두꺼운 하드커버를 넘겨보니 첫 페이지에 내 이름과 함께 ‘혜존(惠存)’이라고 적혀 있었다. 2005년도에 선물 받은 책이었다. 1/3지점까지 읽은 흔적이 있었다. 선물한 사람의 이름도 적혀있었지만 누군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태동 작가의 아름다운 우리 수필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아름다운 우리 수필>은 2편도 출간되었는데, 내가 선물 받은 책은 2편을 계획하기도 전이라 제목 뒤에 ‘1’이라는 숫자도 없는 초판이었다. 불행하게 누구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선물한 사람의 안목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15년이 지난 지금에야 다시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아름다운 우리 수필 내용

<아름다운 우리 수필>은 ‘사색’, ‘자연’, ‘삶’, ‘생활’이라는 4가지 주제에 대한 한국의 명수필을 엮은 책이다. 총 30인의 수필 49편이 수록되어 있다.

 

1부 ‘사색’편이 시작하기 전에 <수필과 그림>이라는 김태길 작가의 글이 실려 있다. 명수필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수필이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소개하려는 목적이다. <수필과 그림>에서 김태길 작가는 수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 번째로 수필은 소설이나 희곡과 달리 현실을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두 번째로 운율적인 시와는 달리 산문의 표현 양식을 빌려 묘사한다. 세 번째로 진리를 밝히는 논문과 달리 의식 또는 무의식중에 아름다움의 창조를 꾀하여 은연 중 독자의 미감에 호소하는 일면이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는 것이 수필이다.

 

 

 

좋은 수필이란 무엇인가?

좋은 수필의 조건

그렇다면 수필 중에서도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일까?

 

좋은 수필은 자연스럽고 평범한 듯 하면서도 그 가운데 뭔가 비범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좋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과시하거나 미화하기 위한 거짓이 들어가선 안 된다. 그 다음, 주제에 대한 깊은 사유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심상에 떠오른 것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문장력을 갖추어야 한다.

흔히 글의 질은 표현력이 좌우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어떻게’보다는 ‘무엇을’이 더 중요한 것이 수필이다. 시인은 ‘시가 와야지’ 시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시인은 필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필은 다르다. 수필은 작가가 끈질기게 파고 들어야 한다. 자기의 체험 또는 사색에 관한 글이 완성될 때까지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그래야 좋은 수필이 탄생한다.     

 

 

 

한국 명수필 추천

수필은 크게 체험 또는 사색에 바탕을 둔다.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우리 수필>에 수록된 명수필 중에 나는 체험에 바탕을 둔 수필은 박완서 작가의 것이 좋았고, 사색에 바탕을 둔 수필은 박이문 작가의 것이 좋았다. 

 

<죽은 새를 위하여>라는 수필에서 박완서 작가는 통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새를 본 체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자연친화적인 집을 짓겠다고 창살도 없는 통유리창을 냈다. 새는 앞산을 그대로 비쳐 보이는 통유리창에 속아 그만 목뼈가 부러질 만큼 빠른 속도로 부딪혀 죽어버린다. 자연친화적인 집이 오히려 자연을 파괴한 것이다. 이 체험을 통해 작가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을 위한답시고 행하는 ‘자연친화적’인 활동들이 얼마나 위선적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집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새는 한 쌍이었으니 필시 엄마 아빠였을 것이다. 둥지에서 먹이를 찾으러 나간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 지친 새끼들이 피나게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듣고 즐거워한 온갖 새소리 중에는 그 어린 새끼들의 슬픈 원성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을 갈라놓는 건 이런 극복할 수 없는 착각이 아닐까.’  

 

 

사색에 바탕을 둔 수필 중에는 박이문 작가의 <고독>이라는 수필이 좋았다. 작가는 고독이 자아를 마주하기 위한 필수적인 경험이라고 말한다.

‘고독은 우리가 그냥 사물이 아니라 의식의 자유를 가진 존재임을 드러낸다. 자유롭기 때문에, 아무리 도피하려 해도 도피할 수 없는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선택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롭고 그 괴로움은 절대적으로 나의 것, 오로지 나만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에 나는 궁극적으로 고독을 느껴야 한다. 이처럼 고독은 자유와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완전히 자유로운 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아를 마주하기 위해서는 고독의 아픔을 체험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독의 아픔을 모르는 사람은 자아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 더 긴밀하게 연결된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멀어지고 각자가 고독해지는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사회에서는 박이문 작가처럼 고독을 상처가 아닌 기회로 볼 수 있는 발상이 더더욱 필요할 것 같다.

 

 

 

아름다운 우리 수필 추천하는 이유

책을 읽으며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적 가치를 매길 수는 없어도 좋은 수필의 느낌은 어렴풋이 이해한 것 같다.

 

무엇보다 30명의 수필가들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다른 문학 장르보다 더 긴밀하게 작가의 세계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필의 매력을 다시금 느꼈다. 그들이 직접 체험하고 사색하고, 그 다음에 글로 옮기기까지 끊임없이 사유해서 만들어 낸 깊은 웅덩이를 너무 편하게 관조하다 가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다.

 

10년이 지나 다시 만난 값진 선물이었다. 왜 책장 한 구석에 깊숙이 박혀 있었을까.

 

<아름다운 우리 수필>을 엮은 이태동 문학평론가의 <서재를 정리하며>도 책에 실려 있다. 여기서 이태동 작가는 책을 ‘파도처럼 밀려오는 추억의 밀물을 막는 둑’이라고 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상황, 그 책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았을 때의 감정 등이 되살아난다는 뜻이다. 비록 나는 이 책을 선물해 준 사람의 얼굴도 기억 못했지만 이 책 또한 추억의 밀물을 막고 있었다. 바로 1/3지점에 북마크를 대신해 꽂아 놓은 트럼프 카드 때문이다.

 

2005년은 내가 한창 카드마술에 빠져있을 때였다. 틈만 나면 카드가 손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마술을 연습했다. 아마 선물 받은 책을 맛보기로 훑어볼 때에도 트럼프 카드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난 15년 동안 구석에 처박힌 책과 함께 유기되었던 트럼프 카드는 조개가 품은 진주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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