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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리뷰

<희랍어 시간> 리뷰 -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by 저피 2020.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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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언어능력을 잃은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어느 날 갑자기 말하는 법을 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리고 언어능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조금씩 시력을 잃어간다.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글자만 남은 희랍어를 전공하고, 청력을 잃은 소녀를 열렬히 사랑했던 그에게는 시력이 곧 언어력이었다.

 

이 두 주인공은 죽은 언어인 희랍어 강의에서 선생과 제자로 만난다. 어렸을 적에도 한때 말을 못했던 여자는 ‘비블리오떼끄’라는 생경한 불어단어를 발음하며 기적적으로 치유된 바 있다. 두 번째로 말을 잃자,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며 그녀는 가장 낯선 언어인 희랍어를 배우러 남자가 강의하는 아카데미를 찾는다. 

 

 

여자에게 언어는 공포 그 자체다. 그녀는 반년 사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혼한 남편에게 9살짜리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긴다. 그리고 전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려 한다. 여자의 세계는 이렇게 송두리째 무너져버린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여자는 말을 못하게 된다. 말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어에 원리가 없다는 것을 안다. 언어는 자의적인 기호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세계처럼 언제 무너져버릴지 모르는 위태로움이다. 그래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

 

 

여자는 김기택 시인이 쓴 <소>를 연상케 한다. 김기택 시인은 소에게 말(言)은 눈에 담겨있다고 했다. 소는 말이 눈에 담겨있기 때문에 내뱉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순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기에 말을 가두어버린다. 다만 주인이 그의 말을 들어주길 간절히 바라며 눈물 머금은 커다란 눈을 꿈뻑거릴 뿐이다.     

 

 

소 같은 여자의 말을 들으려 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다. 그에게 언어는 자아와 운명을 결정짓는 원인이다. 그래서 주체적인 삶을 방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언젠가 시력을 완전히 잃을 거란 허망함에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나 화엄의 세계관에 심취한다. 보편적인 질서가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력을 잃은 그의 첫사랑인 요하임 그룬델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인다. 질서나 규칙에 따른 보편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일탈을 즐기며 오늘을 산다. 그녀는 청력을 잃은 자신과 시력을 잃은 남자가 함께할 수 없다며 남자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 남자는 만약 자기가 시력을 잃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룬델과 조금 더 닮은 생각을 하고, 그녀와 계속해서 대화할 수 있었다면 평생 못 잊을 첫사랑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상상한다.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언어는 공포이면서 실존을 얽매는 사슬이다. 하지만 둘은 언어능력을 되찾고 싶어한다. 간절하다. 남자는 완전한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눈에 담고자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독일에 두고 홀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한다.

 

요컨대 그는 메시지를 기다리는 ‘간절한 수신자’다. 여자는 다시 말을 하고 싶다, 아니 해야만 한다. 아이를 데리고 해외로 나가려는 전남편에게 욕을 해야 하고, 아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아무 데도 안 가도 된다고 말해야 한다. 즉, 그녀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간절한 송신자’다. 언어란 어쩔 수 없는 양날의 검, 혹은 파르마콘인 것이다.

 

 

여자와 남자가 사어(死語)인 희랍어 강의에서 만나는 설정이 처음에는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미 죽은 언어인 데다, 남자가 시력을 완전히 잃고, 여자가 말하는 능력을 되찾는 순간 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이 설정은 언어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함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와 남자가 결국에 소통하는 방법은 글자나 소리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준비된 송신자와 수신자인 둘의 대화는 여자의 검지와 남자의 손바닥이 만나는 접촉, 그리고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는 호기심과 열린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소가 눈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언어라는 기호는 그들에게도 필수조건의 지위를 상실한다.    


여자주인공은 검은 옷, 낮은 목소리, 마른 체구, 웅크린 자세, 손목에 두른 머리끈으로 묘사된다. 내가 KBS <TV책>에서 처음 봤던 한강의 모습 그대로다. 한강은 분명 자기 모습을 여자주인공에게 투영했다. 한강에게도 언어는 분명 위태로운 유리알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녀의 글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그토록 숱한 고민과 고독한 싸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배어있을 수 있겠나. 그녀의 글에는 독자마저 조심스럽게 대하도록 만드는 강력함이 묻어있다.     

 

 <희랍어 시간>은 내 ‘비블리오떼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힌 책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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