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종류
세상에는 두 가지 중독이 있다고 본다. ‘능동적 중독’과 ‘수동적 중독’.
우리가 흔히 ‘중독’하면 떠올리는 능동적 중독에는 중독임을 알면서도 자행하는 흡연이나 음주가 있다. 반면 수동적 중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것으로, 수년간 일한 공장에서 유해한 화학물질에 중독되어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즉 일차원적인 구분은 자신이 중독된 사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무조건 유해한 것에만 중독되는 것은 아니다. 중독이 자기파괴적인 악행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실로 우리는 선택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한 많은 것에 이미 수동적으로 중독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독은 결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중독이 시작되면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갈구한다. 개인의 주체성은 사라지고, 중독된 것에 의해 살아진다. 너무 의존하게 되어 대상이 사라지면 나도 곧바로 무너질 것만 같다.
하지만 모든 중독이 필연적으로 파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고맙게도 우리의 심리가 본능적으로 파멸을 막는 방어체계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중독과 같은 사랑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그/그녀와의 나쁜 기억들이 이별을 합리화시킬 때가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알게 모르게 중독되어버린 고향으로부터 멀어지면 우리는 그리운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언젠가는 다시 만날거란 희망으로 금단현상을 달랜다.
중독을 활용하는 방법
적당한 중독은 잘 활용한다면 오히려 삶의 뜨거운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나의 주체성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이 된다면 말이다.
중독은 없으면 생각나는 것이고, 있어도 생각나는 것이다. 꼭 잡은 실타래가 풀어질라 치면은 이내 감아 당기는 열정이다. 나의 전원이 잠시 꺼진 순간에도 내 옆에 꼭 붙어있기를 바라는 동반 수면의 욕구다. 결여를 인정하고 빈 공간을 채워줄 무언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 이것이 꿈이자 하루를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과유불급. 아무리 좋은 것도 넘치면 해로운 법이다. 그래서 중독이 무서운 것이고, 중독인 줄도 모르는 수동적 중독은 더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동적 중독을 발견해 능동적 중독으로 바꾸어야 한다. 나의 모자람을 고백하고 채워주길 바라는 것이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간절함, 꼭 필요하다는 믿음, 가진 것에 대한 감사, 그것이 바로 중독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나는 중독됐다. 너에게, 오늘 하루에. 너 또한 그러하다. 수많은 길 중에서 하나를 고집한 출근길에, 그리고 뚜벅뚜벅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너의 발걸음에도.
그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가끔 마음껏 결여되고, 기대고, 향유하고, 능동적으로 중독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에 중독은 뜨거운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중독성을 인정한다면 더 간절히 희망하고, 무뎌진 일상에도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류는 무형, 무색, 무취의 공기에 중독되어 폐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상도 호흡이 수동적 중독이 아닌, 능동적 중독이 되어야 해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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