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대통령이 피부암이 간과 뇌로 전이되어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남은 시간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2023년 2월 현재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만 98세로, 미국의 최고령 대통령이다. 그런 그가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니 역사의 한 장이 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생애
지미 카터는 1924년 10월 1일에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풀네임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로 아버지의 이름 제임스를 물려받았다. 땅콩 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도우며 유년기를 보냈다.
어렸을 적부터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 위치한 미국 해군 사관학교(US Naval Academy)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바로 입학을 하지는 못했다.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주립대학(Georgia Southwestern College)에 입학한 후, 이듬해에 조지아 공과대학(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편입했으며, 3년 차가 되어서야 결국 꿈에 그리던 미국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1946년부터 1953년까지 해군에서 군복무하였다.
1954년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지미 카터는 전역을 하고 고향 조지아주로 돌아와 아버지의 땅콩 농사를 물려받았다. 물려받은 땅콩 농사가 크게 확장을 하면서 그는 지역사회의 병원, 도서관 등의 이사회를 역임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1971년에 조지아주 주지사가 되었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냈다. 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에게 패해 4년 단임 대통령으로 임기를 마쳤다.
퇴임 후에는 세계 곳곳의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소외계층을 위해 집을 짓는 NGO 단체 해비타트(Habitat) 활동에 힘썼으며, 그밖에도 다양한 인도주의적 활동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국내 주요 정책
지미 카터의 정책 우선순위는 에너지, 환경, 인권에 있었다. 인본주의적 가치들이고, 현대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화두로, 당장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더 살기 좋은 나라, 더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고자 노력한 대통령이었다.
그 일환으로 임기 중에 미국 정부 부처인 에너지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Energy)를 설립했다. 에너지부에서는 태양열과 풍력과 같이 재생 가능한 에너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에너지부는 이처럼 다양한 에너지 생산 프로그램을 관장하고, 에너지 절약과 관련된 연구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핵무기 프로그램, 원자로 생산, 방사능 물질 폐기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독성 폐기물 현장을 정화하기 위한 슈퍼펀드 프로그램(Superfund)을 1980년에 설립했고, 같은 해에 알래스카 국익 토지 보존법(Alaska National Interest Lands Conservation Act)을 제정했다. 국립공원 체계에 편입시켜 알래스카 지방의 1억 3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구역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는 알래스카 국익 토지 보존법을 자신의 최고 업적 중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
주요 외교 정책
지미 카터의 외교 정책도 인권과 평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978년에 카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중동분쟁을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에서 성공적으로 해소시켰다.
임기 동안 중국과는 완전한 외교 관계를 구축해 수교했으며, 소련과는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SALT-II)으로 무기를 통제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1977년 8월 당시 파나마 운하를 둘러싼 미국과 파나마의 끊임없는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지대의 대부분을 파나마에 반환하는 파나마 운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79년에 발생한 이란 인질 사태는 평화와 인권을 주창하는 그의 외교 정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당시 친미 정권이었던 팔라비 왕조를 혁명으로써 몰아내고 시아파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은 상황이었는데, 지미 카터 행정부가 팔레비 전 국왕의 미국 입국을 허가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란 급진 강경파들은 1979년 11월 주이란 미대사관 직원들 52명을 인질로 붙잡았고, 지미 카터가 백악관을 떠난 1981년 1월이 되어서야 444일 만에 석방했다. 이란 인질 사태와 더불어 당시 사상 최고 수준에 육박하던 인플레이션과 금리라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지미 카터는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인도주의적 행보: 카터 센터
퇴임 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꾸준히 인권과 인도주의적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갈등을 중재하고, 전 세계의 질병과 빈곤을 퇴치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운 비영리 단체 카터 센터(The Carter Center)를 설립했다.
카터 센터는 설립 이후 전 세계의 113개국에서 선거 감시 활동을 벌였으며, 인간에게 종양을 일으키는 기니 벌레(guinea worm)와, 아프리카 대륙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감염되는 강맹안증(river blindness)을 유발하는 회선사상충을 퇴치해 질병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요컨대 지미 카터의 대통령직은 민주, 평화, 인권이라는 인본주의적 가치로 점철된다. 정치인으로서 시도한 것과 쌓은 업적을 두고 본다면 한국 대통령 중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퇴임 후에도 그 가치들을 증진시키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며 끝까지 헌신한 사려 깊고 마음 따뜻한 리더십을 선보였다. 인본주의적 가치가 그러하듯 그가 남긴 유산이 눈에 확연히 띄지는 않을지라도, 오늘날 우리는 분명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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