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여행을 마치고 LA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영화 엘비스(Elvis)를 봤다.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에 빙의한 듯한 주연 오스틴 버틀러(Austin Butler)의 명연기에 감탄하고(오스틴 버틀러는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영화는 끝나 있었고 비행기는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의 감동이 가시지 않아 LA에 도착하자마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듣고, 그의 옛 사진과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그의 외동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Lisa Marie Presley)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기사를 읽은 날로부터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일(사망일은 1월 13일이었다)이었고, 잠시지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LA에서 차로 고작 30분 거리인 칼라바사스(Calabasas)의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꽤나 선연하게 다가왔다.
본인의 전용기도 “리사 마리”라고 이름 지을 만큼 하나뿐인 딸을 무척이나 사랑했으나 그녀가 고작 아홉 살일 때 사망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 외동딸이 향년 54세로, 유전으로 보이는 심장질환에 의해 아버지와 동일한 사인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사실까지 더해져서 나는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오늘은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로큰롤의 황제(King of Rock and Roll)"라고 불리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는 음악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1950년대 중반에 음악계에 등장해서 순식 간에 사회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당시의 그를 최고의 자리로 이끈, 전율을 일으키는 라이브와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를 영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오늘날에도 그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여전한데, 그를 로큰롤의 황제라 칭송해 마땅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얘기해 볼 수 있다.
대중성 (팬덤의 확장과 사회적 통합)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왕으로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다양한 관객에게 어필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시기의 미국에서 활동했다. 흑인은 흑인 음악을, 백인은 백인 음악을 듣는 시대였다.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는 인종뿐만 아니라 나이와 성별의 장벽을 깨고 모든 대중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남녀노소흑백 누구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들었고,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같은 공간에서, 팬이라는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서 그에게 열광했다.
분열되었던 사회를, 문화라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로 통합시킨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다. 하지만 그 과정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
흑인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쏟아지는 백인들의 비하를 이겨내야 했고, 청소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기성세대의 손가락질을 극복해야 했다. 그를 향한 비난에도 엘비스는 굴복하지 않고 흑인의 음악과 문화를 더욱 차용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으며, 당대에는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은 춤사위를 포기하지 않는 대신 자진해서 군입대를 하고, 평소에 겸손한 모습을 보이며 기성세대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예술성 (새로운 장르의 개척)
엘비스는 로큰롤 음악의 선구자였다. 그는 컨트리, R&B, 가스펠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융합하여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매우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음악뿐만 아니라 그의 보컬도 이질적이었다.
당대 백인사회의 주류 음악이었던 컨트리 음악의 전형적인 나긋하고 청량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엘비스의 목소리는 매우 힘차고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노래를 라디오로 처음 접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를 흑인으로 짐작하기도 했다.
엘비스의 음악을 논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마지막 요소는 바로 라이브 공연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대는 오히려 그의 음악을 저평가할 정도로 화려했다. 무대 위에서 그의 존재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으며, 공연은 매우 역동적이고 매혹적이었다.
특히 "힙 셰이크(Hip Shake)"라 불리는, 박자에 맞춰 하반신을 흔드는 춤이 그의 시그니처 동작이었는데, 초반에는 기성세대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가 포기하지 않은 덕에 아직까지 엘비스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상품성
엘비스 프레슬리는 당대에 이미 음악인을 초월한 존재였다. 그는 30편이 넘는 영화에도 출연했고, 그의 패션과 헤어스타일은 바뀔 때마다 유행을 이끌었으며, 그의 얼굴이 찍힌 상품들은 내용물과 상관없이 불티나게 팔렸다. 요컨대 그는 ‘스타성’이 있는 예술가였다.
영화가 실패를 해도, 해외 순방이 물거품이 돼도, 살이 찌고 건강이 악화돼도 이미 엘비스는 엘비스였다. 문화의 아이콘이자, 단독의 브랜드였으며, 그가 곧 대중문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경제, 사회, 문화적 영향력이 모두 지대했다.
자연히 후대 문화인들은 그를 모방하거나, 그의 행적을 배우고 익혔다. 엘비스의 뒤를 이어 대중문화에 또 다른 획을 그은 비틀즈도 그를 주요한 영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엘비스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가 싹을 틔운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음악이 단순한 음악을 뛰어넘어, 사회의 결속력을 높이고, 형언할 수 없는 열정을 개개인의 마음 속에 불지피며, 이해할 수 없이 맹목적으로 마음을 쏠리게 하는, 빅뱅처럼 일으키는 수많은 추상적인 반응들의 끝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서 있다. 그는 심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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