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쯤 퇴사를 할 생각이었다. 좋든 싫든 인생은 기니까 잠깐은 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현실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이성적으로 딱 1년만 쉬기로 했다. 소위 말하는 갭이어(Gap Year)를 가지려고 한 것이다.
세계 여행보다는 도시 몇 군데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어디를 갈지 오랜 기간 아내와 논의한 끝에 우리는 스페인과 남미에 가기로 했다. 둘 다 남미를 여행해본 적은 없으나 그 자유롭고, 열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짙은 문화를 동경하고 있었다.
스페인 3개월, 멕시코 3개월, 콜롬비아 3개월, 아르헨티나 3개월이라는 큰 틀을 잡은 다음, 국가마다 머물고 싶은 도시와 머무는 동안 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멕시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가고 싶었던 이유
그때 멕시코에 머무는 3개월 중 최소 1개월에서 2개월은 지내자고 말한 곳이 바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Puerto Escondido)였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스페인어와 서핑.
아내와 나 둘 다 갭이어를 준비하며 틈틈이 스페인어를 공부했지만 그래 봤자 1년 동안 1주일에 30분 정도 학습지를 풀거나 전화 수업을 수강한 게 전부였다. 스페인과 남미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턱 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 한 달 정도는 현지에서 스페인어 학원을 다니며 공부에만 전념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서핑은 작년에 우리 부부가 푹 빠진 취미였다. 우리는 금요일에 퇴근을 하면 차를 타고 양양 기사문 해변으로 달려가 토요일과 일요일에 서핑을 하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오곤 했다. 서핑을 하다보니 같은 서핑 샵에 다니는 사람들과 호형호제하며 부쩍 친해졌고, 나중엔 기사문 해변에 그들과 나란히 장박 텐트를 쳐놓고 초겨울까지 양손을 입김으로 불어 녹이며 서핑을 했다.
이러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우리의 관심과 필요를 모두 충족시켜줄 만한 곳이 바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였다. 그곳에는 서핑과 스페인어, 두 가지 토끼를 보장하는 학원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한 두달 간 학원에서 제공, 또는 소개해주는 숙소에서 숙박을 해결하면서 오전에는 해변에서 짜릿하게 서핑을, 오후에는 에어컨이 빵빵한 학원에서 안락하게 스페인어를 배우며 지낼 수 있는 것이었다. 갭이어를 하는 동안 우리가 머물 다른 도시들에 대해서는 크고 작은 대립이 있었으나,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갭이어를 갖지 않았다. 말년 병장의 기분이 조금씩 들면서 남은 휴가들을 제한 근무일을 세어보기 시작할 즈음에 뜻밖에도 미국 LA 발령을 제안받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퇴사를 할 생각이었고, 갭이어라는 어려운 결정을 같이 내려 준 아내에게도 미안한 마음에 한 번은 거절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두 번째 제의는 아내와 숙고 끝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남미도 가깝고, 돈 문제도 덜었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서로를 위로하며 LA에 왔다. 그러니 첫 해외 여행지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를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멕시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여행
이전 포스트에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와하까(Oaxaca)에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Puerto Escondido)로 이동했다. 도로가 잘 개발되어 있지 않아 버스를 타면 10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45분 만에 갈 수 있는 경비행기를 발견했다. 아침에 승객을 태우고 와하까에서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를 간 다음, 그곳에서 승객을 다시 태우고 돌아오는 왕복 항공편이 딱 하나 있었다.
아에로투칸(Aerotucan)이라는 항공사에서 운행하는 경비행기로, 최대 10명 정도 탑승할 수 있는 크기였다. 이 또한 재미난 경험일 거라는 생각에 우리는 아에로투칸 항공권을 두 장 샀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는 우리 말고 네덜란드에서 여행 온 한 커플이 더 있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까지 포함해 6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하필 그때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태풍이 오는 날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가량 늦게 출발했는데, 승객은 4명이 전부인 경비행기에, 찍고 돌아오는 왕복 코스가 하루 운행의 끝이 었으니, 탑승 준비를 위한 연기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기후 상황을 지켜본 것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종석 앞유리는 끊임없이 내리는 비와 짙은 구름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 작은 비행기가 기류에 무섭게도 흔들렸고, 네덜란드인은 시종일관 눈물을 흘리며 남자친구의 손과 좌석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다.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 45분 후 아에로투칸 비행기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공항에 착륙했고, 남이었던 우리 넷은 전우가 되어있었다.
멀미가 가시지 않아 나와 아내는 15분 정도 걸리는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지러운 건 많이 나아졌지만 호텔까지 걸어가는 동안 온 몸이 비에 홀딱 젖었다. 갭이어를 꿈꿀 때 우리가 그리던 쨍쨍한 햇빛의 푸에르토 에스콘디도가 아니었다. 거칠게 바람이 불고 아플 정도로 따갑게 비가 내리고 사방이 어둑어둑한 데다 태풍이 올 때 특유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해변가에서 여유롭게 서핑을 즐기면서 멕시코 사람들과 스페인어를 나누는 모습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멕시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태풍
더 충격적인 소식은 숙소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다. 바로 태풍에 대한 자치정부의 지시로 인해 숙박시설을 제외한 인근에 있는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는 걸 막으려고 주류 판매도 금지했다는 것이다.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는 일절 판매하지 않았고, 애써 연 곳을 발견해 찾은 작은 동네 슈퍼에서도 술은 끝까지 판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리가 묵은 호텔 레스토랑이 입맛에 맞지 않아, 그 옆 호텔의 레스토랑에 갔는데, 정부 지침으로 투숙객이 아니면 음식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편 있는 아에로투칸 경비행기를 타고 아침 일찍 도착해서 얼리 체크인을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호텔에 감금되어, 돈을 주고 맛없는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지루한 시간을 온전히 맨 정신으로 버텨야 했던 것이다.
라 푼타 해변으로 이동
2박 3일의 짧은 일정에, 마지막 3일 째는 다시 아침 일찍 와하까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다. 다행히 와하까가 기대보다 너무나도 좋았던 지라, 돌아가면 온종일 하루를 더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은 위로가 됐지만,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서 하루를 날린 마음은 너무나 무거웠다.
다행히 둘째날 아침에는 해가 쨍하게 떴고, 우리는 지난 날은 잊어버리고 남은 하루라도 더 알차게 보내려고 과감하게 환불받지 못할 1박을 취소하고, 라 푼타(La Punta) 해변 근처로 다시 숙소를 잡아 이동했다.
라 푼타 해변에 가보니 드디어 상상하던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를 맞이한 기분이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고, 거리에는 마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좁은 길목에 술집, 카페, 식당들이 쭉 늘어져있었고, 거리에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당장에라도 바다에 뛰어 들어갈 수 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인도를 여핼할 때 갔던 고아(Goa) 지방의 해변들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를 찾은 목적을 달성하러 서핑 수업을 신청하고 그 시간까지 아기자기한 매력을 지닌 작은 야외 바에서 각종 칵테일과 맥주를 마셨다. 옆 자리에 앉은 독일 커플과 미국인 친구 한 명을 사귀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3평 남짓한 호텔 방에 갇혀 보낸 하루를 보상받았다.
전날 겪었던 황당한 일을 공유하니, 그들은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지역은 태풍이 지나가지 않았지만 본인들이 묵은 지역은 태풍을 제대로 맞아 곳곳에 가로등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라가고, 차들이 침수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전기와 인터넷마저 끊겨 어쩔 수 없이 라 푼타로 왔다고 했다.
분명히 인명 피해도 없지 않았을 거라며 투덜대는 우리를 나무랐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태풍이 훨씬 심했어서 서핑 수업은 취소될 가능성이 크다며 미리 경고를 했다. 그리고 그들의 말대로, 시간에 맞춰 서핑 수업을 들으러 가 보니 아직 파도가 너무 높고 불안정해 수업은 다음 날로 연기한다고 했다. 다음 날 와하까로 돌아가야 했던 우리만 환불을 받았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 여행 필수 코스
다행히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대해서는 충분히 사전 조사를 하고 온 터라, 서핑 말고 할 수 있는 것들, 꼭 해보고 싶었던 게 곧장 떠올랐다. 바로 거북이 방생. 바코초 해변(Playa Bacocho)에는 거북이 알을 수집해 안전하게 부화시킨 다음 바다로 방생하는 자선 단체가 있다.
거북이 보호에 쓰이는 기부금을 내면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거북이를 직접 바닷가에 방생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방생에 앞서 우리는 거북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분별한 플라스틱 사용, 빛을 따라 움직이는 거북이를 오도하는 빛공해, 부화를 방해하는 기후변화 등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경각심과 죄책감을 되새겼다. 직접 피부가 닿으면 안 될 만큼 여린 존재라 우리는 나무로 만든 작은 그릇에 새끼 거북이들을 인계받았다.
거북이들이 기어 나올 수 있게 그 그릇을 바닥에 놓고 조심스럽게 기울였고, 한 마리씩 방생할 때마다 그들에게 ‘도’, ‘레’, ‘미’, ‘파’, ‘솔’, ‘라’, ‘시’라는 계이름을 붙여주며 모두가 바다에 들어갈 때까지 응원하고 기도했다. 그 작은 존재가 드넓은 바다로 들어가려고 몇 번이나 파도에 부딪히고 떠밀려 다시 해변으로 돌아오면서도 이내 낑낑대며 다시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환경을 넘어 삶에 대한 심오한 사유까지 하고 있었다.
해질녘에 거북이를 방생하고 다시 돌아온 라 푼타 해변은 차분해져 있었고, 낮에 본 독일인 커플과 미국인 친구는 숙소를 찾아 들어 갔는지, 다른 도시로 이동했는지, 다시 볼 것처럼 약속했던 거리에 있지 않았다. 태풍이 완전히 지나 간 라 푼타 해변은 이제 고요했고, 비록 1년 넘게 손꼽아 기다려 온 서핑을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행복했고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와하까로 돌아가는 아에로투칸 경비행기는 기류로 인한 흔들림 없이, 잠에 들 만큼 편안한 비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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